Русские видео

Сейчас в тренде

Иностранные видео


Скачать с ютуб 146. 인생, 죽음을 넘어 영원을 향하는 증인의 삶을 살자. в хорошем качестве

146. 인생, 죽음을 넘어 영원을 향하는 증인의 삶을 살자. 3 недели назад


Если кнопки скачивания не загрузились НАЖМИТЕ ЗДЕСЬ или обновите страницу
Если возникают проблемы со скачиванием, пожалуйста напишите в поддержку по адресу внизу страницы.
Спасибо за использование сервиса savevideohd.ru



146. 인생, 죽음을 넘어 영원을 향하는 증인의 삶을 살자.

146. 인생, 죽음을 넘어 영원을 향하다. 이런 면에서 성경도 그런 허구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한 문제들이 있지만 우리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자신들을 돌아볼 때 때론 불행한 일도 있지만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한 일들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생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문제가 뭐냐면 죽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든 불행하게 살든 한 인생을 살다가 죽음이 직면해 오면 누구나 다 당황스럽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어떤 마지막이라고 하는 압박감이 분명히 존재하겠습니다. 그래서 회안에 눈물을 흘리면서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또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정말 초연하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벗어날수 없는 최종적인 생의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영원한 존재로 살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원천적인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의심과 불순종의 죄로 인해 죽는 것입니다. 몸은 멀쩡한데 영이 죽은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리낌이 있는 존재화된 것입니다. 소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낮을 피하는 겁니다. 그래 죄의 삯으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단절되는 관계가 현실화된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1장 33절에 보면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아브라함이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다”는 그러한 희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21장 5절입니다.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쉬운 성경에는 “예배”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내가 내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죽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통해 아브라함의 절대적 믿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을 초월하는 구약성경의 서광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원시 시대와 같은 아브라함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영생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인식하고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하는 그 근원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끝까지 지속된 것을 여러 문명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도 있고 메소포타미아에도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인 멕시코에도 있고 하물며 동양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시황 같은 경우는 불로초를 찾으려고 그렇게 평생을 헤매다가 생을 마감하고 그도 모잘라 자기가 죽을 때에는 살아있던 것 같은 똑같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수 많은 부장품들을 땅에 같이 묻어버리면서까지 영원히 살 것을 희망했습니다. 인류의 발달된 문명의 역사에는 항상 그러한 사후에 대한 열망이랄까? 바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왕만 그런 게 아니고 서민들에게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문명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간간히 나오는 해외 토픽을 보면 최근에는 “러시아에서 죽은 사람을 냉동실에 보관하고 있다가 입관을 하려니 사람이 살아났답니다. 그래 친구들을 모아놓고 보드카를 마시며 기뻐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잊을만 하면 기사화 됩니다. 죽음이라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는 죽은 돼지 뇌에 피를 주입하니 뇌가 살아나기도 했으며 심장이 멎은 후에 심장 소생을 통해 살아나는 일례들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뇌와 심장의 정지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니 죽음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임을 분명해 보입니다. 하물며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인 영원함은 이보다 더 오묘한 신비의 영역인 것 또한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영역의 영원한 생명 말입니다. 죄사함의 증인의 삶을 살자 그럴 때 오늘 누가복음 24장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죄를 용서함 받는 회개의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증인으로 삼으시고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라”는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당하신 온전하신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인류의 참된 제자들을 통해서 숭고한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확신하고 소망을 갖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확실함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때로는 짐승에 찢김을 당하고 불에 타 죽었고 십자가에 죽는 순간까지 버릴 수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마지막 종착역에 이르렀을 때,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내놓을 수 없는 죽음을 댓가로 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확증하고 원수들조차도 사랑했던 위대한 삶의 존귀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열매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아담을 빗대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인 신비이자 하나님의 은혜로서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예언했던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이 본문 24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어지고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고 기쁨과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믿는 신자들이 갖는 영생에 대한 소망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비평적인 성경적 태도를 취했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았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물려준 교훈이고 믿음의 실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도 마치 지옥과 같이 분노에 차게 하는 삶의 모습들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갈비”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밑에 사람은 올라오지 못하도록 갈구고 윗사람 한테는 짤리지 않으려고 아부하듯 비비는 삶의 처세 말입니다. 이처럼 삶이란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그것을 극복해 낼수 있는 힘의 근원이 뭐냐 하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죄에 대한 해결입니다. 그 죄를 주님께서 내어놓으며 진실하게 용서를 구하면 죄사함과 회개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바라보면서 소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의 영광 말입니다. 이것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로 주어지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확증 되어질 때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리의 삶을 다스려질 때에 우리에게는 은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삶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함으로 맺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천 송도역 남인천농협앞, 베짜마 카페에서 이종화였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