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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 호라즘 정벌 - 파르완 전투 (The Mongol conquest of Khwarezmia: Battle of Parwan) 4 года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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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 호라즘 정벌 - 파르완 전투 (The Mongol conquest of Khwarezmia: Battle of Parwan)

The Battle of Parwan was fought in 1221 between Sultan Jalal ad-Din Mingburnu of the Khwarezmid Empire and the Mongol Empire commanded by Genghis Khan's adopted brother Shikhikhutag. 파르완 주(영어: Parwan Province)는 아프가니스탄 중앙부의 주로서 주도는 차리카르이다. 수도 카불의 북쪽에 있다. 1221년에는 몽골인과 잘랄 앗 딘이 이끄는 호라즘 제국간에 전투가 벌어져 몽골군이 패퇴하였다. 사마르칸트를 함락시킨 후 징기스칸은 1220년 여름 사미르칸트 남쪽 나사프(지금 Karshi)에서 더위를 피하고 가을에 아무 다리아강으로 나가 발흐(Balkh)맞은편 도시 테르메르(Termez)를 공격하여 11일만에 함락시켰다. 1221년 봄 아무 다리아강을 건너 발흐시를 점령하여 고대 박트리아 지역(현재 아프카니스탄령 투르게스탄)을 정복했다. 징기스칸은 무하메드 술탄의 아들 자랄 웃딘이 호라산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아들을 보내어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몽골군은 자랄 웃딘의 경로를 조사하여 사막을 넘어 추격했다. 몽골군은 네사(Nassa 호라산 서쪽에 있는 도시)부근에 있는 카란다르(Kharandar)성에서 술탄의 아들이며 자랄웃딘의 두 동생 우즈라그 샤(Uzlagh Shah)와 아쿠샤(Akhu Shah)를 만나 교전중에 패주하는 척하여 그들이 승리했다고 방심하는 틈에 급습하여 두 왕자를 죽였다. 징기스칸은 발흐와 타레칸(Talecan) 함락 후 1221년 여름 박트리아 산지에서 여름을 보내고 파로포미사스(Paropamisus)산맥이 힌두쿠시(Hindukusi)산맥과 이어지는 지점에 위치하는 군사적 요충지인 바미얀(Bamijan)을 공격했다. 바미얀공격시 차카타이 아들 무츠겐이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징기스칸이 직접 독려하여 바미얀시를 점령하고 전리품을 생각하지 않고 모구 파괴하고 모두 살육했다. 호라즘 황태자 자랄 웃딘은 바미얀 동남쪽 500㎞에 있는 가즈니(Ghazni)에 몸을 피했다. 자랄 웃딘은 그곳에서 터키 용병과 아프가니스탄 토민들을 모아 7만명의 기병을 구성했다. 징기스칸은 4만5천명의 군사를 주어 시기 쿠두크(忽都忽)로 하여금 정벌토록 했다. 시기 쿠두크는 징기스칸이 자랄 웃딘을 감시하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카불(Kabul)과 자부리스탄(Zabulistan) 사이 힌두쿠시 산악지역에 3만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한 분견대가 파르완(Parwan)에서 자랄 웃딘군을 만나 패했다는 소속을 접수받고 시키 쿠두크는 전군을 이끌고 파르완 평원으로 나아가 자랄 웃딘군과 대치했다. 자랄 웃딘은 중앙을, 우익은 아민 아루 마리크(Amin Al Malik), 그리고 좌익은 아그라크(Seit-ud-din-Agrac)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자랄 웃딘군의 우익은 1만 정도의 몽골군을 돌파했다. 급히 시기 쿠두크는 중군으로 좌익을 도와 전열을 간신히 회복했다. 이후 자랄 웃딘군과 시기 쿠두크군은 파르완 평원에서 서로 돌격하면서 싸웠으나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다. 그래서 밤이 되어 각각의 진지로 돌아갔다. 시기 쿠두크는 몽골군의 수가 적보다 적었으므로 밤사이에 예비 말에 인형을 태우고 다음날 아침 전투대형을 갖추고 지원병이 도착한 것처럼 꾸몄다. 자랄 웃딘은 기병들에게 허리띠에 말고삐를 묶도록하여 전투대형을 갖추고 몽골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몽골기병은 적진으로 돌격했으나 빗발치는 화살로 사상자가 속출하여 진영을 재정비하려고 일단 뒤로 물러섰다가 재차 공격하자 자랄 웃딘의 진영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때 자랄 웃딘은 나팔을 불게 했다. 그러자 호라즘군은 대형을 넓히면서 몽골군을 양익으로 포위할 듯이 덤벼들었다. 시기 쿠두크는 군기를 잡고 지휘했으나 몽골병은 군기를 보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다가 평지에 패인 홈에 말발굽이 빠져 말과 사람이 같이 나둥그러지면서 추격하는 적의 휘두르는 칼에 맞아 태반이 죽음을 당했다. 파르완 전투는 몽골군이 패한 최초의 전투였다. 징기스칸은 파르완의 패배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시기 쿠두크는 너무 승리만 하여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실패의 교훈을 잘 살려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리고는 징기스칸은 2일간에 걸쳐 병사들이 식사를 끓여 먹을 틈을 주지 않고 서둘러 파르완으로 향했다. 파르완에 도착하여 먼저 쿠두크로부터 양군 진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징기스칸은 쿠두크의 작전 방법이 나빴음을 꾸짖고 전쟁터의 선정도 잘못됐음을 지적했다. 전쟁 패인이 쿠두크의 지휘 잘못에 있음을 일깨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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