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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명상숲 https://www.upaper.net/sati578 #보조국사지눌 #마음 # 송광사 1158년 고려 중기에 태어나신 지눌스님은 어렸을 때 몸이 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절에 가서 아들의 병만 낫게 해주면 출가시키겠다고 다짐하셨지만 병이 낫고 나서는 차마 아들과 헤어지지 못하여 망설이기를 반복하셨다. 결국 다시 병으로 고통 받게 되자 8살에 종휘선사를 은사로 출가하게 되셨다. 그 후 소백산 묘봉암에서 9년 동안 수행하였고 25세에는 승과에 합격하여 세속적인 앞날을 보장받으셨지만 개경에서 열린 담선법회에서 타락한 승려들의 언행을 보고 크게 실망하셔서 명리를 버리고 개경을 떠나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길로 들어가셨다. 지눌스님은 일생에 거쳐서 세 번의 큰 깨달음을 얻으셨다. 첫 번째는 전남 나주 청량사에서 육조단경을 읽으시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은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라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이를 계기로 육조 혜능선사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두 번째는 경북 예천 학가산 보문사에서 3년간 대장경을 열독하시다가 화엄경의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다”라는 구절과 “몸은 지혜의 그림자”라는 구절에서 크게 깨달으셨다. 이로써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선교일치의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셨다. 1188년에는 팔공산 거조사로 옮기셔서 정혜결사를 조직하셔서 수행 실천운동으로 권수정혜결사문을 선포하셨다. 오늘날 팔공산 거조사는 오백 나한님을 모신 절로 유명하다. 세 번째는 1197년 거조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은둔하시며 대혜어록을 보시다가 현실 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셨다. 대혜종고는 간화선 수행을 체계화시킨 송나라 때의 선승이시다. 지눌스님은 43세 되던 해인 1200년에 송광산 길상사로 가셔서 11년간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시며 민중들을 깨닫게 하셨다. 송광산은 조계산, 길상사는 수선사를 거쳐 송광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눌스님에 대하여 조사하면서 고려 중기의 시대 상황을 알게 되었다. 문벌 귀족은 화엄종, 법상종 같은 교종과 가까웠으며 무신정권은 선 중심으로 교를 합한 조계종과 가까웠다. 고려 왕권의 복귀를 위하여 희종은 교종 중심의 승병들과 힘을 합쳐서 최충헌에 대항하였지만 실패하여 승병들은 몰살당하고 희종은 폐위되었다. 그래서 최충헌은 세속과 관련이 많은 교종보다는 수행 중심의 새로운 종파인 조계종에 힘을 실어줬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최충헌의 부인이자 강종의 딸인 정화택주는 기구한 운명을 화두 참구로 극복했다는 기록이 전해 내려온다. 고려초 대각국사 의천은 여러 종파로 갈라진 고려 불교의 화합을 위하여 교학 중심으로 선을 흡수한 천태종을 창립하였지만 그 후 고려의 상황을 보면 여전히 종파가 난립하여 불교는 방향을 잃은 것 같았다. 고려 불교가 점점 세속적으로 변해갔지만 지눌스님께서 뜻을 같이 하는 스님들과 향도라는 서민들의 모임과 함께 정혜결사를 조직하여 권수정혜결사문을 선포하시면서 고려 불교는 지속될 수 있었다. 지눌 스님께는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깨달음을 얻으신 지눌스님만 믿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수행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어렸을 때 병치레가 잦은 자신을 돌봐준 누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점심 식사에 초대를 해놓고 수저를 한 세트만 준비하도록 했다. 스님 혼자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에 배가 고파진 누나는 슬슬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누님은 제가 밥을 먹으니 배부르지 않으신지요? 누님은 제가 깨달았기에 동생 덕에 저절로 구원받아 극락에 가실 걸로 믿고 계십니다. 밥을 직접 먹어야 배가 부르듯이 법도 스스로 구해야지 남이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크게 깨우치신 누나는 열심히 수행 정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말씀이었다. 영험한 장소에 가고, 큰 도인을 만나고, 지식으로 도를 안다고 깨닫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원인과 결과, 연기를 이해하며 스스로 노력하여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야겠다. 지눌스님께서는 승과에 합격하여 앞날이 보장된 위치에 계셨지만 그 길을 버리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세 번의 깨달음을 거치면서 선교일치의 사상을 정립하셨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수행해 나간다는 정혜쌍수와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으로 수행해 나간다는 돈오점수를 중심으로 수선사 운동을 일으키셨다. 스님께서는 일생을 통하여 끊임없이 수행하셨으며 스스로를 마음의 소를 길들이는 목우자라고 지칭하셨다. 사찰 외벽에 그려져 있는 심우도 그림이 지눌스님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승보사찰 송광사에는 지눌스님께서 마지막 10년을 수행하셨던 수선사와 스님의 사리탑이 있다. 스님께서는 1210년 송광사 대중 앞에서 법을 설하신 후 앉으신 채 입적하셨다. 1954년에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에서 보조지눌스님의 불교 사상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조계종의 종조가 태고보우스님에서 보조지눌스님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만암스님, 만해 한용운스님, 석전 박한영스님은 조선불교를 흡수하여 말살하려는 일본의 조동종에 대항하여 태고보우스님의 임제종을 설립하셨지만 일제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고려 말 태고보우스님은 혼란스럽던 불교 종파를 임제종으로 통일하여 화합을 이루셨지만 고려 멸망 후 들어선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임제종의 가르침은 사라졌다. 고려시대 불교의 역사를 보면, 고려 초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학을 흡수한 교학 중심의 천태종을 창립하여 불교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보조국사지눌이 교종을 흡수한 선종 중심의 선교일치, 돈오점수 사상의 조계종을 창립하셨다. 지눌스님은 뚜렷한 스승이 없이 부처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특히 화엄경에서 큰 영향을 받으셨다. 여러 고승님들을 알아가면서 점점 화엄경에 대하여 관심이 깊어진다. 우리나라 화엄종은 의상대사가 창립하였으며 연대를 비교해보면 중국의 것이 아닌 독자적인 종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의상대사가 집약한 화엄경의 정수 법성계를 다시 읽어보고 현대 천체물리학의 다중우주론, 양자역학의 법칙이 법성계에 그대로 나타나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승님, 고승열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