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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필리핀 해 해전(Battle of the Philippine Sea)//조종의 NAVY썰(해군 이야기) 3 года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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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필리핀 해 해전(Battle of the Philippine Sea)//조종의 NAVY썰(해군 이야기)

#마리아나 #칠면조 조종의 즐거운 게임방송! NAVY 디스코드:   / discord   워쉽 카카오톡 오픈챗팅방:https://open.kakao.com/o/gnMvZI0 후원하기:https://twip.kr/donate/hyen1404 트위치 방송//   / hyen1404   -----------------------------------------------------------------------------------------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동부 솔로몬 해전, 과달카날 해전. 이 해전들은 모두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벌어진 함대항공전이었으며, 이들 항공전 진행 될때마다 태평양 전쟁의 양상은 조금씩 변화해갔다. 이 처럼 함대항공전은 이미 해전의 중심이 되었으며, 일본과 미국 모두, 항공기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이후, 1944년, 과달카날에서의 혈전 끝에 핸더슨 비행장을 지켜낸 미군은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하게 되며, 일본의 절대 국방권을 노리기 시작한다. 오늘 이야기 할 네이비썰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필리핀 해 해전이다 1944년, 과달카날 전선에서의 패배로 일본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 할 수 없었고, 수세로 전환하게 된다. 일본은 인도네시아 남부 도서지역 일대, 뉴기니 서부지역,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해상 방어라인을 설정하고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한다. 그러면서 일본은 내부적으로 함대를 재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반면, 과달카날 전역에서 핸더슨 비행장을 사수해낸 미군은 전시체제하에 생산된 보급품들이 하나하나 전선에 도착하기 시작한다. 특히 핼켓 전투기는 기존 1200마력이었던 F4F 와일드캣에 비해 2,000마력 엔진을 장착한 신형기로 모든면에서 기존 전투기보다 성능이 좋았다. 또한 에식스급 항공모함은 3만6천톤급의 항공모함으로 함재기를 최대 127기까지 탑재할 수 있는 대형 항공모함이었다 보급또한 전선에서 충분히 소비하고 남을정도로 보급이 되면서 미 해군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했다. 문제는 미군의 진격로였다. 미군의 진격로는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뉴기니아 방면으로 진출 필리핀 남부로 들어가는 진격로였고, 하나는 중부 태평양 섬을 공략하여 대만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방법이었다. 이때 뉴기니아로의 진격은 맥아더 장군이, 중부 태평양으로 진출은 어니스트 킹 제독이 주장했었다. 사실상 육군과 해군을 대표하는 장성이 진격로에서 서로간에 입장차이가 나타난거다. 이때 어니스트 킹 제독은 절충안으로써 마리아나 제도를 침공하자고 육군에게 건의를 했다. 미 해군은 1943년 11월 부터 길버트 제도 침공작전 및 일본 해군 남방 작전의 거점인 트럭환초를 점령하면서 중부 태평양으로 가는 거점을 확보했었다. 만약 미 해군이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면, 당시 신형 폭격기었던, B-29 폭격기의 항속거리로 도쿄까지 폭격을 할 수 있었다. 어니스트 킹 제독의 제안에 맥아더 장군 또한 이에 승낙하였고 미군의 다음 목표지는 마리아나 제도로 결정된다. 미군은 마리아나 침공을 위해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지휘봉을 맡겼으며, 중부 태평양 해역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때 해역군의 중핵인 제 58 임무부대는 마크미처 제독이 맡게 된다. 사실 미처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과 불편한 관계였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처제독은 호넷의 함장이었는데, 부하 한명의 실수를 감싸기 위해, 보고 누락 및 은폐를 하다 스프루언스 제독의 눈 밖에 난것이다. 하지만 이전 길버트 제도 침공작전 당시, 소극적인 항공모함 운용에 니미츠 제독은 미처제독의 일선 복귀를 적극적으로 건의를 하게 된다. 이에 스프루언스 제독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지만 미처제독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경우 해임한다는 조건부 승락하에, 다시 일선에 복귀 하게 된다. 이렇듯 모든 준비를 마친 미 해군은 본격적인 반격을 개시하기 시작했고, 58임무부대의 대규모 함대는 마리아나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미군의 움직임에 일본 또한 바빠지기 시작한다. 일본은 1943년 중반부터 절대국방권을 설정하면서, 앞으로 있을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역으로 큰 승리를 취한뒤, 미 해군의 진격을 돈좌시킬 생각이었다.이에 일본은 미 함대의 예상지점을 필리핀 남부 캐롤라인제도 혹은 마리아나 제도 둘중 하나로 예상했다. 그리고 1943년 11월, 길버트 제도 침공, 트럭섬 침공등, 미군의 공세가 확실시 되기 시작하면서, 머지 않아 미군이 대규모 공세를 펼칠거라는것은 예상했다. 이때 트럭 환초 공격과 서부 뉴기니의 공격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다음 목표는 필리핀 남부 캐롤라인 제도라고 예상했다. 이에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및 뉴기니아, 비약섬에 병력을 증원하는 혼작전을 개시한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5월과 6월초에, 일본군은 항공기 220대를 포함한 증원 병력을 투입해, 뉴기니 섬을 방어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마리아나 제도로 가야될 항공기와 수상함들이 동남아시아 부분에 묶이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들은 마리아나 해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앞으로 있을 일본군이 마리아나 해전에서 패전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거기다가 1943년 이후 빈약한 대잠력을 파고든 미 해군 잠수함 부대는 일본 해군의 새로운 근거지인 타위타위에 있는 연합함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일본 해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일본군의 저항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격전을 치르면서 와해되어 버린 항모전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이어졌고, 전함 중심의 함대 편성이 아닌 항공모함 중심에 새로운 편성을하면서 미 해군의 항공모함에 대적하려고 했다. 거기에 파일럿들의 사기도 높았다고 한다. 전쟁 전부터 가장 기량이 높은 파일럿들을 1항공전대에 배속시켜 함대를 운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1항공전대에 배속되었다는것에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해군이 미함대와 결전을 버리는 곳을 마리아나 제도로 선택한것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로는 마리아나 제도의 전략적 위치였다. 이 위치는 남으로는 뉴기니섬과 일본을, 동으로는 필리핀을, 서쪽으로는 서태평양 노릴 수 있는 태평양의 길목에 있는 위치였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개전 초기 이 지역을 점령한 후 항공 기지를 설치하고 요새화하였으며, 괌을 포함한 마리아나 제도의 섬들에는 모드 항공기지가 있었다. 인사권에도 변화가 있었다 일본해군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아닌 오자와 지사부로를 새로운 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3년까지, 기동부대는 나구모 주이치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미드웨이와 동부솔로몬 해전, 산타쿠르즈 해전에서 그의 우유부단함에 기회를 놓친것을 여러 본 본 일본해군은 나구모 제독을 사이판에 있는 중부 태평양 방면 함대 사령관으로 보냈고, 제 1 항공전대의 자리를 오자와 지사부로에게 맡긴다. 6월 11일, 미국의 제 58 임무부대가 마리아나 제도 인근에 도착했다. 이들은 도착과 동시에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 비행장들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이 일대 항공전력을 약화 시켰다. 거기다 이오지마를 공습하기도 하면서, 마리아나로 올 추가 항공전력들도 약화시킨다. 미군의 마리아나 제도 침공 소식을 듣고 일본은 미 해군을 마리아나 제도에서 막는 아호작전을 발동하면서, 모든 가용 할 수 있는 연합함대가 6월 15일 키마라스 정박지에서 출격한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미 잠수함들의 추적으로 함대의 규모나 전력이 거의 정확하게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들어가고 있었다.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은 함대를 총 3개 그룹으로 나누었다, 구리타 제독휘하의 경항모 치토세, 치요다, 류호와 전함 야마토, 무사시, 콩고 ,하루나를 중심으로 하는 C부대. 190km 후방에 정규항공모함 다이호, 쇼카쿠, 즈이카쿠로 이루어진 핵심 전력인 A부대 그리고 개조항모 히요, 준요 그리고 경항공모함 류호로 이루어진 B부대였다. 오자와 제독은 C부대가 전위에서 색적 및 적의 공습을 흡수하는 임무를 맡겼다. 만약 적 항공모함이 정규항공모함 그룹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전위 부대의 호위기와 대공망을 거쳐서 와야하기 때문에 안전했다 또한 오자와는 미 함대에 비해 아군이 유리한 부분은 제로기의 항속거리라는 점을 파악했고, 이 장점을 극대화 하는 전술을 마련한다. 당시 와일드캣의 항속거리는 최대 500km정도였고, 제로기의 경우 800km정도였다. 따라서 500km 이상의 거리에서 제로기를 출격시켜 적 함대를 공격한다면 적은 아군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어,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아웃레인지 전법이라고 하며, 미 해군보다 훨씬 더 긴 항속거리를 이용한 일방적인 공격방식이었다. 거기에 일본군은 과거와 달리 정찰도 대폭 강화했다.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 패배의 요인을 부족한 정찰기라고 생각했다. 부족한 정찰기 때문에, 적 항공모함의 위치를 적기에 찾아내지 못해 상대에게 기회를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전 초기 7기에 불가한 정찰기를 점차 늘리기 시작했고 산타쿠르즈 해전 당시에는 2단 색적으로 미 함대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발견했던 일본함대는 더 세밀한, 3단 색적을 활용해, 정찰력을 강화했다. 6월 17일이 되자, 58 임무부대의 미처제독은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찾아 공격 및 추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스프루언스 제독은 신중했다. 지난 함대항공전들을 보아, 일본은 전방에 미끼함대를 두어 아군 함대를 유인하고 빈틈을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마리아나 제도의 섬들은 모두 일본군의 항공기지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항공모함이 이들과 연계해 공격한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스프루언스 제독은 현재 해역을 고수하며, 일본의 공격에 철저한 방어전을 명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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