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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다해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아버지는 누구를 성체성사로 부르시는가? 오늘 복음도 역시 성체성사에 관한 복음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살아있는 빵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가 아버지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께 오는 이들을 당신이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선택하시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그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방박사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들에게 별을 보내시어 당신 아드님께 이끄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드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동방박사들을 당신 아드님께 부르신 것일까요? 분명 구원될 이들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아버지의 뜻과 어긋나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당신께로 이끄실 수가 없습니다. 아드님을 보내신 이유는 죽이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만약 죽이려는 뜻이 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홀어머니가 어린 오누이(햇님과 달님)를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이웃 마을 잔칫집에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밤늦게 떡을 얻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넘을 때 무서운 호랑이(또는 늑대)가 나타나 어머니를 가로막았습니다.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오누이에게 줄 떡을 아까워했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떡을 하나씩 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호랑이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타나 떡을 요구했고, 결국 떡이 다 떨어지자 어머니마저 잡아먹고 말았습니다. 호랑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의 옷을 입고 집으로 찾아가 오누이까지 잡아먹으려 했습니다. 호랑이는 걸걸한 목소리로 어머니인 척했지만, 오누이는 문틈으로 비친 호랑이의 모습을 보고 속임수를 알아챕니다. 겁에 질린 오누이는 뒷문으로 도망쳐 마당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습니다. 호랑이는 우물에 비친 오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무 위로 올라오려고 합니다. 오누이는 꾀를 내어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오라"고 거짓말을 했고, 미끄러운 나무를 오르지 못하던 호랑이는 도끼로 나무를 찍으며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위기에 처한 오누이는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살리시려거든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주시고, 죽이시려거든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튼튼한 금 동아줄(또는 새 동아줄)이 스르르 내려왔고, 오누이는 그 줄을 붙잡고 하늘로 무사히 올라갑니다. 이를 본 호랑이도 하늘에 똑같이 빌었습니다. "하느님, 나도 불쌍하니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러자 이번에는 썩은 동아줄이 내려왔습니다. 욕심 많은 호랑이가 덥석 줄을 잡고 올라가다가 중간에 줄이 끊어져 땅에 떨어져 죽고 맙니다. (떨어진 곳이 수수밭이 되어 수숫대가 붉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하늘로 올라간 오빠는 해님이 되고, 동생은 달님이 되어 세상을 비추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햇님과 달님’ 동화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동아줄입니다. 하느님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오누이에게는 그들도 잡아먹히지 않도록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노리는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사람을 살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뜻에 어긋나는 이를 당신 동아줄로 끌어올릴 수는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사람을 살리려는 좋은 마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마음을 보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치실까 봐 헤로데에게 가지 않고 그를 피해 돌아갑니다. 그전에도 헤로데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착한 사람들이였기에 다른 이들도 착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아드님께 부르시는 이들은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착한 뜻은 하느님처럼 생명을 살리려고 내 피를 쏟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착한 뜻은 나 자신의 근원적 결정입니다. 이 착한 뜻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삼구, 곧 세속-육신-마귀가 행복이라 여기는 이들입니다. 이는 부모나 환경의 교육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착한 뜻이 어렸을 때 장착되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경쟁사회에서 착한 뜻을 갖기란 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쟁 위주의 나라에서 착한 뜻을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요? 착한 뜻을 심는 교육이 된다면 성체성사를 위해 많은 사람이 붐비게 될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상대를 이용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내어주어 생기는 친밀한 관계가 행복임을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학교에서 배워나가며 착한 뜻과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뜻처럼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성체를 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