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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유치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5분 만에 이해하기 4 года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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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유치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5분 만에 이해하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개괄이자 강연록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읽어봅니다 :) ==== 책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 우리는 이 책의 토대가 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이 펼쳐진 당시의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강연은 1945년 10월 29일에 열렸습니다. 약 5개월 전인 1945년 5월에 독일이, 같은 해 8월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였죠. 강연의 연사이자 프랑스 실존주의의 대표자격이었던 장 폴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로가 되었고, 약 1년여간의 수용소 생활 끝에 풀려날 수 있었는데요. 개인의 자유가 사회의 부조리함으로 인해 얼마든지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눈을 사회참여로 돌리게 됩니다. 그는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는 한편, 소설 구토와 존재와 무 등을 출간하게 되죠. 참고로 존재와 무의 경우 46판 인쇄라는 철학 서적으로는 유례가 없는 대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실존주의라는 사상을 대중화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르트르였던 겁니다. 그런데 이 시기, 실존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실존주의에 대해 ‘모든 해결책이 닫혀 있으며, 이 세계 속에서의 행위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고려될 수 밖에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실존주의는 명상 철학으로 귀결되며, 이는 곧 부르주아 철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죠. 종교인들은 실존주의가 인간의 비열한 면, 수상쩍은 면, 메스꺼운 면을 보여주는 반면, 인간 본성의 밝은 면을 등한시한다고 비난합니다. 또한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규정했죠. 이 강연은 이러한 사람들의 비판을 반박하고, 실존주의란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습니다.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실존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독트린’, 더 나아가 ‘모든 진리와 행위가 그 어떤 환경과 인간적인 주체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독트린’ (교리敎理ㆍ교훈敎訓ㆍ주의主義ㆍ학설學說) 하지만 사르트는 이 시기 실존주의라는 말이 너무도 넓게 확장되는 바람에 오히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우려하는데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실존주의를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바로 ‘기독교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그것이죠. 사르트르가 보기에 두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평가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체성으로의 출발을 둘 모두 긍정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잠깐,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구체적 쓰임이 정해지고 생산되는 사물과 달리, 인간은 그 누구도 미래의 구체적인 삶의 방향이 정해진 채로 태어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인간은 본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이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고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실존주의 사상의 기본 배경이죠. 하지만 기독교적 실존주의는 결국 그러한 인간도 신이 창조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닙니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에 앞서 본질이 실존에 앞서게 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되죠. 그렇다면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어떨까요? 사르트르는 자신과 하이데거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들은 이들은 신이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이 실존이 결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때문에 신이 없다는 전제 하에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하게 되죠. 인간은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르게 됩니다.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이죠. 정의되지 않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며, 인간이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가 스스로의 본질을 구현해가는 과정, 즉 ‘기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첫 걸음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에 있죠. 그렇다면 대체 왜 이날 강연의 제목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였을까요?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적 우주 속에 현존한다는 의미에서의 주체성을 맺어주는 이 연결, 초월성과 주체성간의 이 연결이 우리가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휴머니즘입니다.” 자, 대체 무슨 말일까요? 사르트르가 보기에 인간 스스로의 선택은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며,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선택을 한다면 이는 모든 이를 위한 선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개개인의 선택은 또다른 의미의 공공적 선택과 다르지 않다는 점,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적인 성격을 지닌 이유라는 것이죠.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 역시 이러한 휴머니즘적 성격에서 기인합니다. 인간 자신이란 한편으로 그 자신이 되기를 원하여 선택한 무엇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그 선택으로 인해 인류 전체를 선택한 존재이기 때문이죠. 인간은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국 그 결과에 대해서도 스스로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이런 불안 속에서 실존적 인간은 선한 선택을 하게 되며, 이를 위한 행동과 결심을 취하게 됩니다. 즉, 실존적 인간 개개인의 행동이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게 되는 겁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사르트르의 철학은 다소 낡은 것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정밀한 구성보다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탓에 이론 자체의 결함도 많이 지적되죠. 하지만 그의 철학을 구석으로 밀어두기 전, 사르트르의 시대와 우리 시대의 삶이 정말로 다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가요? 우리는 스스로 우뚝 선 독립적 주체로서, 그리고 그 선택이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인지하는 실존적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나요? 그저 그런 오늘을, 내일을, 모레를 살아가기 전,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요. 바로 사르트르의 책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통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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