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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살인사건, 어떻게 수사했을까? 조선 시대에도 지금처럼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철저한 검시 절차 (초검, 복검, 삼검) 먼저, 사건 현장에 검시관(사또, 지방관)이 직접 나가 시신을 조사했습니다. 이를 초검(初檢)이라고 불렀어요. 보통 해당 지역의 수령(지방 관리자)이 검시관이 되어 의사 역할의 의원과 기록을 맡은 서리, 법률 전문가인 율관, 그리고 시신을 다루는 오작인 같은 조력자들과 함께 시신을 살펴보았습니다.시신의 외상을 일일이 확인하고, 사건 관련자들을 1차 심문한 후에 검안서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윗분들(한성부, 관찰사)에 보고했지요 초검이 끝나면, 복검(覆檢)이라는 두 번째 검시를 시행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검시관이 와서 똑같이 시신을 다시 조사하는 거예요. 재미있는 건, 두 번째 검시관은 첫 번째 검시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마치 시험 볼 때 다른 친구 답안을 못 보게 하는 것처럼, 검시관들이 서로의 검안 내용을 몰랐어요 이렇게 해야 공정하게 다시 검시를 해서 혹시 놓친 게 없는지, 또는 첫 번째 검시 결과에 문제가 없는지 교차 검증을 할 수 있었거든요. 두 차례 검시 결과가 똑같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만약 의견이 다르면? 자, 이때는 삼검(三檢)이라는 세 번째 검시까지 진행됐습니다 세 번째 검시는 중앙 사건이면 형조의 관리가, 지방 사건이면 해당 관찰사가 지명한 관원이 맡아서 다시 한 번 시신을 살폈어요 그래도 초검, 복검, 삼검 결과가 제각각이면 어떻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네 번째, 다섯 번째 검시까지 계속했습니다 즉 결과가一致(일치)할 때까지 최대 오검(五檢)까지도 간혹 했다고 전해집니다. 검시관들은 속으로 ‘아이고, 또 해야 하나…’ 했을지도 모르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검시를 반복한 것이죠. 이처럼 수사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눈으로 반복 검증한 이유는 혹시 모를 잘못이나 비리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사람 말만 믿었다가 자칫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안 되니까, 항상 다른 사람이 다시 확인하도록 한 거죠. 마치 스포츠 경기에서 비디오 판독을 하듯이, 조선의 수사관들은 “한 번 보고 끝내지 말고 두 번, 세 번 확인하라”는 원칙을 실천했습니다. 덕분에 300~500년 전임에도 당시 수사 절차가 꽤 과학적이고 공정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조선 시대 이러한 검시 제도는 세종대왕 때 특히 발전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의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여겨, 공정한 수사를 직접 챙기셨는데요. 실제로 세종 14년(1432년)*에 이런 말을 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시체를 검안하는 것은 사람의 생사가 달린 일인데, 관리가 직접 하지 않고 아전에게만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 세종대왕은 당시 일부 지방 관리들이 시신 검사를 꺼려 아전(하급 관리)들에게 미루는 관행을 크게 꾸짖고, 반드시 관리 자신이 검시를 직접 하라고 명령했습니다